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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그래. 일단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자.
줄곧 긴장하며 살았더니 여기저기 뻐근한 곳이 많아. 그러니 마사지도 받고, 집도 마음껏 활보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편히 살아야지.
모든 일이 싱거우리만치 갑작스레 끝나 버렸지만 리즈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홀가분하다…….
제 속에 드는 수많은 감정 중에 형태가 확실한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그 홀가분함에 매달렸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흐릿하고 모호한 감정들이 형태를 갖추어 그녀를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인사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 케인」
서한에 적힌 케인의 기울어진 글씨체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가 버린다고? 이렇게 끝이 난다고?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가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나 청량하게 웃어 보일 것 같았다. 또는 방으로 찾아와 지난 일을 언급하며 수치스러워 죽을 것처럼 만들 것만 같았다.
설령 오늘 나타나지 않더라도 내일은 나타날 테다. 내일이 아니면 그다음 날엔 나타나겠지.
아무튼 이 집 어딘가엔 그가 있을 거다. 그러니…… 언젠가는 만나겠지.
그렇게 좀처럼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던 케인의 부재는 의외로 몇 시간 만에 받아들여졌다.
잠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던 리즈는 습관처럼 베개 아래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보드랍고 푹신한 감촉 외의 이물감을 느끼고선 손을 빼내었다.
봉랍된 서한 하나가 손끝에 딸려 왔다.
어머니가 집사에게서 건네받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봉랍을 뜯어 펼쳐 보니 서체도 똑같았다. 케인이 제게 남긴 편지였다!
「날 믿고 기다려.」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제 혼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란 뜻?
잠시 헷갈렸다. 조금 설레기도 한 것 같았다. 봉투 안에 든 조그만 물체를 발견하기 전까진.
“이건……”
거꾸로 뒤집은 봉투 속에서 이불 위로 또르르 떨어진 파란색 장신구를 알아본 리즈의 눈이 일순 굳어졌다.
황태자의 모습으로 연회에 나타난 케인이 만남의 징표로 가져갔던 토파즈 귀걸이였다.
그 귀걸이가 돌아왔다.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인연은 이제 끝이라는 의미인 거겠지. 완전히.
“푸훗!”
리즈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됐다. 정말 잘됐다. 자신은 이제 원작을 벗어났다.
그러니 기뻐해야지. 자축해야지. 마음껏 웃어야지.
가슴이 시린 건…… 방 어딘가 창문이 열려 있기 때문일 거야.
***
황궁 동편의 고풍스러운 잿빛 석조 건물에 평의회 의원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장년층 남자인 이들은, 치켜든 턱과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눈매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커다란 문 앞에 당도하자 근위대원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올리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십수 명의 대귀족들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이제 막 들어온 바텔스 후작이 회의석 끝자락에 앉는 것으로 평의회원들이 모두 모였다.
“오늘의 안건은 뭐랍니까?”
바텔스 후작이 바로 옆의 제르드 공작에게 귀엣말을 했다.
본디 안건은 대신들이 사전에 입을 맞추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회의 직전까지 비밀에 부치는 것이 철칙이었지만, 틈새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즉위 관련해서 두 건이요. 모두 대공 전하께서 내셨답니다.”
“아…… 드디어 전하께서 움직이시는군요.”
바텔스 후작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났다.
“그렇게 실종된 조카를 기다리시느라 언급을 피하시더니.”
“전하께서도 이젠 현실을 받아들이신 게지요. 아무튼 잘되었습니다. 진작 이리되었어야죠.”
“그럼 외국 귀빈들에게 초대장부터 보내야겠군요.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할 겁니다. 그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당장 오늘에라도 사신을 출발시켜야 할 것입니다. 대제국 황제의 대관식 초대장을 전서구의 발에 묶어 보낼 수는 없으니 말이지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는 사이 몬타네르 대공이 의장과 서기를 대동하고서 회의장에 입장했다.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그가 착석하자 의장인 르메르 공작이 건조한 개회사를 읊은 뒤 나무망치를 두드렸다.
“첫 번째 안건을 발표하겠소.”
사람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즉위식은 제국 내 대귀족만을 초청하여 간소하게 치를 것.”
“예에?”
다들 제 귀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외국 귀빈들도 초대하지 않고요?”
“그렇소.”
대공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의장이 했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대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시는데 어찌 타국의 왕족과 귀족들의 축하를 받지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그들에게 이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게 해 줘야 합니다.”
거센 반발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최근 신흥국들이 치고 올라오고, 그중 하나는 급격히 세력을 불리며 칭제까지 선언한 탓에 심기가 몹시 불편한 이들이었다.
대관식으로 명실상부한 대륙의 주인을 확고히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만큼 이 안건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공은 그들의 반발에도 고요한 눈빛과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안건을 제시한 자답지 않게.
“저는 찬성입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을 것 같던 회장의 분위기를 일시에 반전시킨 인물은, 이 평의회의 실세 베르트 공작이었다.
“선선대 황제이신 밀로스 폐하께선 보이는 것보다 내실을 중시하라고 했습니다. 연이은 가뭄이 흉작으로 이어지며 민심이 어지러운 이때, 외국 귀빈들에게 보여 줄 요량으로 성대한 연회를 베풀기보단 차라리 그 돈으로 구휼에 힘쓰는 게 장기적으론 이득이 아닐는지요?”
너무나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반박을 못 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그……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칠백 년 제국 역사상 황제의 대관식을 그처럼 조촐하게 치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화려한 대관식 한 번으로 제국 역사가 칠백 년에서 끝나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시지요?”
베르트 공작이 실세답게 힘 있는 목소리로 반격을 눌렀다.
“최근 급부상한 네르안 왕국은 고작 열 명의 대신들 앞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지요. 칭제를 하겠다 선언한 저 오만한 테렌디스 왕국 역시도 간소하게 대관식을 치른 뒤 긴 마차 행렬과 식량 보급으로 전 왕국민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어요.”
네르안과 테렌디스.
의심할 여지 없는 신흥 강국이자 루젠시아의 위상을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원로들은 귀가 솔깃했다.
“이런 근본 없는 국가들도 실속을 차리는데 우리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오히려 우리가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태도를 취하면 저들에게 되레 경계심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로드리크 후작이 힘을 보탰다. 마흔 언저리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그는 베르트 공작과 더불어 평의회의 떠오르는 실세였다.
이처럼 힘 있는 발언권을 가진 이가 둘씩이나 찬성을 표하니 나머지 사람들도 슬그머니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베르트 공작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고, 그들은 제 가문이 이번 대를 끝으로 멸문하길 바라진 않았다. 제국의 존속을 위해선 대세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거수로 결정하겠습니다.”
의장 르메르 공작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스무 명 중 열다섯 명. 압도적인 찬성으로 안건이 통과되었다.
땅-, 땅-, 땅-.
의장의 나무망치 소리를 들으며 몬타네르 대공이 베르트 공작에게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만나며 미소를 주고받았다.
몬타네르 대공이 소동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평온할 수 있었던 건 친우인 베르트 공작 때문이었다.
그는 제 역할을 너무 잘해 주었다.
사람들을 부추겨서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끔 해 주는 역할 말이다.
그가 큰 난관을 넘게 해 주었으니 남은 안건은 비교적 쉽게 성립될 터였다.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즉위식을 앞당길 것.”
***
셋 중 하나일 줄 알았다.
습격을 당해 죽거나, 아니면 자신과의 대련 중에 죽거나, 아니면 죽진 않더라도 미쳐 버리거나.
그중 하나는 반드시 제 조카 헤르시스에게 일어날 거라고 몬타네르 대공은 확신했다.
한데 조카는 그 모든 예상을 깨고 징글징글할 정도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한때는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다들 이래서 제자를 양성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매일같이 성장해 가는 조카의 모습은 생각 외로 그에게 뿌듯함을 선사했다.
하지만,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서야 곤란하지.’
조카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순간 그는 깨달았다. 더 크기 전에 이 짐승을 도살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번 마상 창 시합은 익명으로 치르는 게 어떻습니까?’
창술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시합에서의 죽음은 죄를 묻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탓에 너무 안일했다.
영광스러운 승리, 아니면 영예로운 죽음. 기사에게 그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다며 큰소리치던 녀석이 도망치는 쪽을 택할 줄이야.
왜지? 그토록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녀석이 갑자기 왜 도망을 쳤지?
뭔가를 알아차린 건가? 알아냈다면 어떻게?
미처 태우지 못한 황후의 유품이 있었던가? 거기서 뭔가 단서를 찾아낸 건가?
아니면 융통성 없을 정도로 올곧기만 한 발데미온 공작이 말해 주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들의 제법 영특한 아들이?
생각할수록 대공은 제 실수에 기가 막혔다. 너무 조심스럽게 때를 기다리다 눈앞에서 어이없게 놓쳐 버린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심정이 이럴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니까.
제아무리 실력이 월등한 헤르라 해도 잘 훈련된 열 명의 자객이 동시에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열 명이 안 되면 스무 명, 스무 명이 안 되면 백 명을 보낼 것이다.
돈은 좀 들겠지만,
‘네 사랑스러운 머리통을 다시 안아 보는 일인데 돈을 아끼면 쓰나.’
하지만 그렇게 금방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던 조카는 몇 년간 스타베팅 이 잡듯 뒤져도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 숨은 거지?
그래도 성년이 되면 나타날 줄 알았다.
황위에 올라 자신에게 복수하겠다는 풋풋한 다짐을 품고 돌아올 줄 알았다. 그때를 대비한 계획도 갖추고 있었는데, 그놈은 성년은커녕 그렇게 도망친 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죽진 않았을 텐데. 자신이 가르친 놈이니만큼 그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는데.
설마 포기한 건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뭐가 됐든 좋다.
그 애가 돌아올 때쯤엔 모든 게 끝나 있도록 만들어 주면 그만일 테니.
제가 예상한 각본에서 단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평의회를 바라보는 몬타네르 대공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문득 시선을 오른쪽 위로 끌어 올려 그곳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금색 판을 바라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역대 황제들의 이름이 생몰 연도와 함께 세로로 음각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다 가진단다.’
몬타네르 대공이 머릿속에서 그 금판의 가장 오른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며 생각했다.
‘네 부모는 그걸 우습게 보아서 명을 재촉했지만, 너만은 다르길 바란다. 헤르. 지금처럼 꼭꼭 잘 숨어 있으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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